[refreshment] period

2003.08.13 11:21

Ilyo Um 조회 수:2331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하고 싶은 대답을 적절히 못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쉬움에 이렇게 당신과 소통하려고 합니다. 채용과는 상관없어요. 그냥 사적으로 정확한 표현욕을 충족시키기 위함일 뿐이죠. ^^

  저는, 꿈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독히 원하는 것. 꿈. 이상적인 목표. 관계. 질서.
하지만 그것은, 아주 가끔 어떤 계기에 의해 표면으로 부상할 뿐 보통은 그냥 체념되고 맙니다.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30대 여자. 그들의 잠자는 꿈을 깨울 계기를 만들고, 그들의 보편적인 꿈에 저의 특수한 꿈을 겹쳐보고 싶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30대 여자들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직장이라는 곳의 교묘한 메커니즘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들 스스로 연결되는 법을 모릅니다. 서로 헐뜯고 질시하고 경쟁하고, 여자들이란 원래 그래, 라는 편견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요.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유쾌한 관계를 원할 겁니다. 화장실 옆칸에서 생리대가 없어 쩔쩔매는 모르는 여자에게 비상용 여유분을 건네주고 느끼는 뿌듯함. (나도 도울 수 있잖아?) 팀 후배가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왔을 때 "센스 좋다 야, 잘 어울려!"라고 칭찬해주는 여유. 그런 약간의 여유, 조그만 팁, 상식이라고 강요되는 편견을 거부할 용기, 그런 자잘한 것들이 모이면 생활에서 꿈을 재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표현한 만화가 바로 <좋은 사람>입니다. 내 꿈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고방식을 지닌 여자들의 유머러스하고 쾌적한 관계 속에서 천천히 흐르는 거예요.


사회적 이슈와 인간 관계를 아우른 기획
  사회적 이슈와 30대 직장여성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엮어 배치할 것인가 물으셨죠?
  자살. 여자들에게 어떨 때 죽고 싶은지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때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지, 뭣 때문에 죽고 싶은지. 그 경험을 공유하고,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겁니다. 혹은, 여러 가지 자살방법을 실천적으로 소개하겠어요. (이해하기 쉽게 친절한 그림도 덧붙여)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아픈지 절절히 묘사해 줄 겁니다. 한마디로, 지독히 아프니까 죽지 말라는 얘기죠. (저는 고통에 한해서만큼은 유물론자거든요)

둔감함에 대하여
  상식이라는 것에서 좀 어긋난 생활을 지속하는 힘을, 아까는 '둔감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난 그렇게 둔감한 인간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소소한 배려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둔감한 사람은 싫어하는 편입니다. 제가 말하는 둔감함은, 제가 인정하지 않는 권위에 대한 둔감함일 겁니다. 실제로, 전 유행에 둔감해요. 그것들이 제 미학적 기준에서 딱히 예쁘지도 않고 그러므로 따라야 한다고도 생각되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나를 지탱하는 힘은 뭘까?
  내 자연스러운 모습에 대한 수긍, 내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렇게 입은 내 모습은 충분히 어울리고 예쁘고 호감을 줄 수 있을 만큼 단정해. 그리고 평상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들이 나를 판단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이런 식이죠. ^^ 그래서 제가 고집이 셀 거라구요? 아녜요.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이해만 시켜준다면, 전 얼마든지 바뀌고 변화합니다. 예컨대, 전에는 섹스가 추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 경멸했습니다만, 사람들과 작품들의 설득에 마침내 그것의 필요성을 납득했습니다. 섹스가, 세상에서 가장 명쾌하고 솔직한 대화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아,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네요.
  하루에 8시간 이상 얼굴 맞대고 일로 부딪힐 사람을 판단하고 정하기엔 15분은 너무 짧아요. (생각해 보세요, 연인이나 친구랑 같이 있는 시간보다 회사 동료와 같이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구요!) 그렇게 오래 같이 있는데도, 회사 동료란, 관계의 우선 순위에서 저 밑에 위치한다는 게 참 이상하긴 하지만요.

  그리고 제 장점 하나 더 어필할래요. 저는요, 매우 성실한 사람이랍니다.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고 있고, 업무도 착착 처리해나간다는 평을 들어요. 서울대학교 입학생 중 극소수는 천재일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저처럼 성실하게 학교공부를 판 아이들이에요. 참을성 많고, 꼼꼼하고, 책임감 강하고, 맡겨진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한 노력파들이죠. 저도 그런 보통의 성실한 학생 중 하나입니다. 대가와 상관없이 소신대로 하고 싶은 일을 신나게 하는 것,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필요하다면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 이것이 제 나름의 장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인터뷰하면서 느낀 건데, 너무 엄숙하지 마세요. 다들 도망가 버린다구요. 만화의 가벼움을 얕보지 마세요. 만화는 그렇게 가벼이 스며들어, 깊이 흔적을 남긴답니다. 아주 영리한 놈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에게 잘 팔리기 위해서는, 그런 가벼움의 미학을 우아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