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써서 보낸 건 너무 시니컬하다고 편집부에서 반려했다. 

그래서 온화버전으로 다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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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혹은 망각에 관한 보고서 



   작가이자 배우 겸 제작자인 댄 슈나이더는 대니얼 월리스의 이름값이 왜 이렇게 저평가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출판사와 평론가들이 좀 뜬다 싶은 작가의 책이라면 질적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찬사를 남발한다며 아니꼬워하고, 외려 대니얼 월리스가 토니 모리슨(무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보다 낫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월리스의 책은 <빅 피쉬>와 이 책 <미스터 세바스천과 검둥이 마술사> 딱 두 권 읽어봤단다. 이것 참, 작가 입장에서는 고맙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겠다.  

   슈나이더는 요컨대, 현란한 수사와 매끄러운 문장과 지적인 깊이를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생생하고 투박한 문장으로 삶의 요점을 짚어낼 수 있다는 거였다. 세상에는 내밀하고 심도 있는 주제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시적으로 써내려가다가 심연의 바닥을 긁는 작가도 있고,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지성의 향연을 펼치다가 스노비즘의 절정을 달리는 작가도 있다. 대니얼 월리스는 그런 현학적인 부류가 아니다. 그는 직설적인 구어체로 일상적인 것을 뒤집어 보여주고 각자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게 만든다. 현실의 전복, 거짓으로 진실을 꿰뚫어 보는 힘이 그가 가진 무기다. 내용 전개에서 피카레스크식 구성이랄지 화자를 여럿 둔달지 해서 약간의 기교를 부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하는 얘기는 따라가기 어렵지 않다. 다만 그가 말하는 A는 A가 아니고, B는 B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이 책에서 그가 캐스팅한 검둥이는 백인이고,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바뀌며, 내 얘기하듯 남 얘기를 풀어낸다. 남부 소도시를 전전하는 변두리 서커스단 사람들의 입을 빌어 헨리 워커라는 한 남자의 생애를 재구성해 나가는데, 이야기를 중첩하며 한 꺼풀씩 벗길수록 진실은 의심을 부르고 기억은 망각을 낳는다. 헨리 워커는 왜 검둥이로 살았을까. 헨리는 정말로 악마를 죽였을까. 헨리가 해준 얘기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한참 아리송한 지경으로 빠져들 때 사립탐정 카슨 멀베이니가 다음 화자로서 바통을 넘겨받는다. 유능한 탐정인 그는 사건에 가장 객관적으로 접근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반전을 제공하며 전복을 완성한다.  

   여러 화자를 채용하여 시점을 바꿔가며 같은 이야기에 다른 살을 입히는 방식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연상시키나, <라쇼몽>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실이 미궁에 빠지는 반면 여기서는 다행히도 점점 진실에 가까워진다. 비록 가까워지기만 할 뿐 속 시원히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대하는 저마다의 태도이다. 슈나이더의 표현을 다시 빌리면, 이 책은 기억(더 정확히는 망각)에 관한 훌륭한 보고서이자,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매모호한 개념을 다룬 한 편의 논문인 것이다. 



   대니얼 월리스는 앨라배마 주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그의 첫 직업은 동물병원에서 동물 우리를 청소하고 항문낭을 짜는 일이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약 2년간 일본 나고야에 머물며 아버지가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업무능력이 영 시원찮아 회사를 그만두고(혹은 아버지한테 해고당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불만이었지만 어머니는 좋아하셨다(아버지가 싫어하는 일이라면 어머니는 뭐든 환영이었다). 그 후로 13년 동안 서점에서 일하며 5권의 소설을 썼으나 번번이 출판을 거절당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땐 내가 아주 대단한 작가인 줄 알았다. 나는 내가 만든 이야기에 매혹됐고, 문장을 엮어서 문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진짜 신기했다. 올망졸망한 잉크 자국들이 한데 모여 뭔가 된다는 게 마법 같았다. 글 쓰는 사람을 작가라고 한다면, 나는 작가였다. 하지만 그 너머는 보지 못했다. 창작의 순수한 기쁨이 다른 모든 판단력을 마비시킨 셈이다. 나는 좋은 이야기와 잘 쓰인 좋은 이야기를 구분할 줄 몰랐다. 나는 글을 써가면서 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쓰지 말아야 할 것도 같이 배웠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책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빅 피쉬>가 터졌고, 그게 나로서는 돌파구가 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이자 첫 번째 소설인 <빅 피쉬>가 출간되면서 그는 공식적으로 작가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 <빅 피쉬(1998)> 이후로 <Ray in Reverse(2000)>, <The Watermelon King (2003)> 그리고 이 책 <미스터 세바스천과 검둥이 마술사>를 펴냈다. 한편, 작가가 직접 삽화를 그려 넣은 <오! 그레이트 로젠펠트(2004)>는 프랑스와 한국에서만 출간되었다. 현재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영문과에서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