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tle stranger -옮긴이의 말

2015.10.16 08:21

arale 조회 수:189


옮긴이의 말



헌드레즈 홀.  

조지 왕조 시대에 세워진 에어즈 가문의 헌드레즈 홀은 집사, 가정부, 메이드, 풋맨, 정원사 등등 못해도 고용인이 스무 명은 넘어야 유지가 되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부지의 외딴 대저택이다. 그러나 재산을 거의 다 날리고 빚에 쪼들리는 에어즈가의 세 식구는 무너져가는 대저택에 어린 하녀 한 명만 겨우 둔 채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말이 은둔이지,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도 차 타고 삼사십 분은 나가야 하는데 그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어 별수없이 고립된 신세니 사달나기 딱 좋다. 조금만 유지보수가 딸려도 금방 흉가 꼴이 나는 낡고 거대한 저택은 안 그래도 고딕 호러의 단골 소재다. 헌드레즈 홀의 분위기는 <어셔가의 몰락>을 연상시키는 바가 없지 않으며, 이 집을 들락거리는 외부인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심지어 이 집의 주인이자 가문의 적자 로더릭은 어셔가의 마지막 후예와 이름도 똑같다.

그러나 <작은 이방인>을 공포 소설 혹은 케케묵은 귀신 들린 집 타령으로만 본다면 이야기가 너무 싱겁다. 전개가 지나치게 느긋하고 유령 또한 하는 짓이 영 게을러 공포물로서의 긴장감은 고무줄처럼 늘어진다. 그렇게 뭔가 지루하다 싶어질 즈음 퍼뜩 섬뜩해지는 것은, 화자인 나 닥터 패러데이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선 안 되겠다는 기분이 들면서다. 이거 단순한 귀신 얘기가 아니라 혹시 중첩에 중첩을 거듭한 추리 소설인가? 


새라 워터스는 전작 <나이트 워치(2006, 문학동네 근간 예정)>를 끝내고 나서도 여전히 194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늘 전후(戰後)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뭔가 할 얘기가 더 남았다고 느꼈다. (실제로 새라 워터스의 최근작 3편은 모두 1, 2차 세계 대전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전후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2차 대전 후 사회가 재편되면서 견고했던 신분 장벽이 무너지고 전통적 상류층이 몰락하는 과정이 그녀의 흥미를 잡아끌었고, 이 작품은 ’전쟁이 영국의 계급 체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 하는 화두에서 출발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일자리와 급여를 제공하는 고용주 노릇을 함으로써 대대로 지역 공동체의 핵심이자 유지로 군림해왔던 영국의 대지주들은 20세기 초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며 땅과 재산을 잃고 한 세대 만에 급격한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에어즈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옛 영화를 간직한 구식 상류계급의 마지막 세대 에어즈 부인과 심려 깊고 호방한 딸 캐럴라인, 그리고 전쟁 때 부상으로 다리를 저는 아들 로더릭은 헌드레즈 홀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빚더미에 올라선 그들에게 낡고 거대한 저택은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 좋았던 옛 시절의 기억은 오히려 현재의 곤궁함을 비참하게 부각하고, 집에 들어가는 엄청난 유지보수비는 그들의 신경줄과 돈줄을 옥죈다. 한편 그런 그들을 연민과 질시가 뒤섞인 감정으로 지켜보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1인칭 화자인 나, 닥터 패러데이는 노동자 계급에서 중상류 계급으로 성공적으로 올라선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헌드레즈 홀에서 유모로 일했으니 어찌 보면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경제적으로 슬며시 역전된 셈이다. 작가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계급적 앙금과 미묘한 심리적 낙차를 섬세하게 잡아내어 시대 분위기를 꼼꼼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구성 면에서는 화자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데 솜씨 좋게 써먹는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만약 이 책이 추리 장르에 속한다면 사실 이건 반칙도 이만저만한 반칙이 아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맨 처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발표했을 때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화자도 대저택의 주치의였고 그의 누이 이름도 캐럴라인이다!) 기본적으로 독자들은 1인칭 화자에 자신을 투사해서 그의 논리와 감정에 따라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화자가 점점 수상해지고 그의 서술을 믿을 수가 없다니, 이 불편한 거리감은 자칫 독서경험 전체를 피곤하게 만든다. 작가는 1인칭 화자에 대한 호감도와 신뢰감을 서서히 허물어뜨리며 애매한 암시를 통해 독자의 마음속에 의심을 불어넣지만, 실제로 어떻게 된 일인가에 대해서는 끝까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가 사실 전달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왜곡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이야기는 '토탈 리콜'이 된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어디까지 믿어도 되나. 이 때문에 어떤 평자들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을 들먹이며 이 작품의 장르적 정체성을 환상 소설의 경계로까지 밀어붙이기도 했다.  


번역을 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캐럴라인과 닥터 패러데이가 서로를 대할 때의 말투였다. 나이는 패러데이가 열서너 살 넘게 위였지만 계급으로는 캐럴라인이 위였다. 아직 신분에 따른 위계가 뚜렷한 시절이었고, 캐럴라인이 초반에 패러데이에게 가볍게 말 놓으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럼없이 말을 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애매한 타협으로 패러데이의 경우 예사높임과 두루높임, 두루낮춤을 섞어서 쓰게 했는데, 그럼에도 패러데이가 캐럴라인에게 지나치게 하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는 전적으로 역자의 미숙함이므로 양해를 구한다.  

끝으로 새라 워터스 특유의 사랑 얘기가 안 나와서 섭섭해할 제(諸) 독자들께 한마디 고하자면, 캐럴라인 에어즈가 닥터 패러데이와 파혼한 이유가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성싶다. (작가는 Afterellen.com과의 인터뷰에서 이 질문에 껄껄 웃으며 딱히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고 답했지만 말이다)